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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발견

해설이 있는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


커다란 그림책을 펼치면 판권란 위쪽에 랭보(1854~1891)의 시 <감각>(Sensation, Jean-Nicolas-Arthur Rimbaud,1870.3.)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1871)의 자서이기도 한 이 시의 둘 째 연 첫 문장이 마음을 흔든다.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

이 문장에는 생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인의 자기응시가 묻어있다. “상쾌한 여름 저녁이 되면 나는 들길을 가리라.”로 시작하는 시는 얼핏 자연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사랑을 잃지 않고 홀로 떠나는 여행이란 없을 것이다. 방랑으로 점철한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베를렌)의 시는 이어진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름 저녁의 느낌을 매우 연한 언어를 통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생명을 낳고 기른 대자연뿐일지도 모른다. 황금색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책의 표지처럼.

한동안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던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라스칼 글. 루이 조스 그림/미래아이2017)은 서커스단의 난쟁이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부리는 곰 ‘오리건’을 등장시켜 인생과 우정에 대해 그리고 있다. 나는 이 그림책을 통째로 삶에 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

“우리는 ‘스타 서커스단’에서 만났습니다.”

이 첫 문장으로 주인공인 난쟁이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은 서커스단에서 관객들을 위무하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난쟁이 어릿광대인 듀크는 “붉은 막 뒤에 숨어”서 곰을 보며 “두려움도 잊은 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는 하지만, 어릿광대 듀크가 하는 일이란 재주 부리는 곰인 오리건을 우리에서 끌고 나오거나 다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그런 듀크에게 오리건은 말한다.


“듀크,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

곰이 말을 하는 거야 그림책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마치 동화책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벌어졌다고 책은 쓰고 있다. 이 문장이 적혀있는 <화면2>에는, 왼쪽 면에 오리건을 끌고 가는 오리건과 듀크의 실루엣이, 오른쪽 면에 커다란 등을 보이고 있는 오리건과 오리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어릿광대 듀크를 그려놓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고삐와 철창이란 ‘경계’를 전제로 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인데, 경계를 넘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인 듀크가 아니라 곰인 오리건이다.

화가는 다만 몇 개의 선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있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화면을 가득 채울 듯 등을 보이고 있는 어두컴컴한 곰의 정면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다. 하지만 어두운 철망에 갇힌 채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라 말하고 있는 오리건의 저 묵언의 표정은 자못 강렬해서, 흰 분칠에 빨강코를 한 어릿광대 듀크의 얼굴과 극렬하게 대비되고 있다.

세로로 죽죽 그어진 철망을 경계로 오리건을 응시하던 듀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지만, 거울 앞에서 분칠한 가면 너머의 본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주를 부리고 나서” 듀크는 오리건과 함께 밤길을 나선다. “무거운 짐과 주머니를 축 늘어지게 하는 열쇠 꾸러미는 두고” “검게 그을린” 공업도시 피츠버그를 뒤로 한 이 둘은 마침내 버스에 올라탄다.

듀크와 오리건은 “시카고로 가는 기차표 두 장과 햄버거 삼백 개”를 산 다음 수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인 Sioux족)의 여관에 든다. ‘인디언 여관’에 방을 잡은 듀크는 ‘코크’를 빨며 총을 든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TV를 보고 있고, 오리건이 방바닥에 쏟아놓은 ‘햄버거’를 먹고 있은 장면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와 함께, 트럭 운전수 스파이크와 여전히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있는 듀크의 대화는 미국 내 소수자들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왜 아직 빨강코에 분칠을 하고 있소? 이젠 서커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흑인으로 사는 건 쉬운 일 같소?”


듀크와 오리건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반 고흐의 그림 같은 들판”에 들어선다. 표지와 동일한 이 장면은 그러나 그림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라 느낌이 다르다. 표지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본문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본문 그림을 살짝 클로즈업한 순방향의 표지 그림이 성큼성큼 밖을 향해 전진하는(a→b) 느낌이라 자리로 천천히 귀의(歸依)하는(a←b) 안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람의 방향(a→b) 또한 이들의 진행속도(a←b)를 슬쩍 늦추고 있기도 하다.

펼침면에 그려진 이 장면은 황금색 들판만이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봇대 하나, 나무 한 그루 없이 망망한 수평의 들판만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다. 마치 자신들이 살아온 흔적 같은 긴 그림자를 끌며 목마를 탄 듀크는 오리건과 한 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리건의 여행》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 장면을 꼽을 것 같다. 표지로 쓸 만큼 책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일 텐데, 나는 삶에 대한 직시 없이 이 장면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삶에 두른 유무형의 장식들을 모두 떼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대면하는 일은, 지난 삶을 송두리째 버리기도 해야 하는 일이므로 용기와 결단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화면2>에서 철창을 사이에 둔 오리건과 듀크의 진실하고 솔직한 대면이야말로 삶을 ‘거듭 나는’ 장면이니 내게는 더욱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둘은 이제 “우박이 내리면 맞으며” 함께 걷고 “옥수수 밭에서는 잔치”를 벌이며 “보드라운 풀밭”에서는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별빛 아래에서는 꿈”을 꾸었고 “새소리는 잠을 깨우는 시계였으며, 강물은 커다란 욕조”였고 마침내 “온 세상이 우리 것”이라 말하고 있다. 마침내 듀크는 “가방 맨 안쪽 구석”에 남은 동전 두 개를 “플랫 강 위에 물수제비”를 뜨며 날려 버린다. 지나온 시간과의 단호한 결별이라 할 수 있다.

로키 산맥의 등줄기 앞에서 “떠돌이 장사꾼, 여배우가 될 거라는 슈퍼마켓 종업원, 이 빠진 깃털 장식을 한 인디언 추장”의 차들을 얻어 타고 ‘아이언 호스’(미국 중서부의 유타 주)에 도착한 듀크와 오리건은 “길가에 버려진 시보레 자동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해인 1935년에 태어난 버려진 시보레 자동차를 가리키며 듀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 모습이 그 차보다는” 낫지 않냐고.


둘은 다시 달리는 기차의 맨 뒤 칸에 올라타 “오리건을 베개 삼아” 몸을 기댄 채 드디어 오리건의 숲에 도착하게 된다. <화면13>의 오른쪽 장면은 우리가 처음 낯선 장소 앞에 섰을 때의 인상을 상기시킨다. 자유의 몸이 된 오리건과 듀크는 삶의 시원처럼 눈앞의 펼쳐진 풍경에 묻혀 그저 먹먹하게 서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검은 아스팔트와 전봇대만이 그동안의 여행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듀크는 거친 오리건 숲으로 들며 “갇혀 지낸 나날을 모두 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서늘한 숲에 든 이 둘은 모닥불을 피워 차를 끓이며 밤을 지새운다.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켰으니 아침이 밝으면 듀크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가문비나무가 있는 오리건의 숲까지 오리건을 데려다 준 듀크는 홀로 길을 나선다.


하얗게 눈이 덮인 오리건 숲길을 따라 멀어져가는 듀크의 뒷모습에서 듀크가 떼어낸 ‘빨강코’는 지나온 삶과의 결별을 상징하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앞날이 무지갯빛으로 펼쳐질 것 같지는 않다. 이 천박한 세계에서 소수자인 ‘난쟁이’의 삶이 평탄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듀크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거라는 점은 읽어 낼 수 있다. 자신의 이유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던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천 킬로가 넘는 대륙을 횡단하고, 그와의 동행을 진심으로 기뻐한 것으로 보아 듀크는 분명 우리가 응원하고 지지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듀크와 오리건이 하나의 존재, 하나의 목숨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몸에서 떼지 않고 다니는 듀크의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아마도 저 가방 안에는 우리가 신뢰해 마지않는 난쟁이 주인공 듀크가 자신의 인생에서 아직 풀어내지 못한 어떤 숙제를 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게 된다.(*)


자료찾기
「오리건의 여행」 / 라스칼 글 ; 루이 조스 그림 ; 곽노경 옮김, 미래i아이:미래M&B, 2017


김환영
195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종이밥』 『해를 삼킨 아이들』, 그림책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호랑이와 곶감』 『강냉이』 『빼떼기』, 장편만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들을 그렸고 동시집 『깜장 꽃』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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